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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설씨 (설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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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설씨는 위구르 출신 설손의 후손으로, 설손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 고려 공민왕 때 귀화했다. 설손은 고려에서 고창백, 부원후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설장수는 조선 개국 후 연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설손의 후손으로는 설장수, 설경수, 설순, 설미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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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설씨 (설손)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문 이름경주 설씨
한자 표기慶州 偰氏
국가한국
관향경상북도 경주시
시조(설손(偰遜))
저명한 인물설총, 설장수, 설미수, 설순, 설송웅, 설민석
인구 (2000년 기준)3,269명
설명
경주 설씨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씨족

2. 역사

설손 가문은 위구르족 출신으로, 설련하에 살았기 때문에 설(偰)을 성씨로 삼았다. 원나라 태부 설극직(偰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은 원나라에서 참지정사를 지냈고, 설문질의 손자 설손은 순제 때 진사시에 급제하여 한림응봉문자, 선정원단사관을 지냈다. 1358년(공민왕 7)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귀화한 설손공민왕과의 인연으로 크게 후대받았으며, 고창백과 부원후에 봉해지고 부원에 농토를 하사받았다.[5]

설손의 맏아들 설장수고려 우왕공양왕 대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정몽주 피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 복권되어 태조 때 검교문하시중에 오르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6]

설손의 넷째 아들 설경수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들 설순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다섯째 아들 설미수는 둔전제 실시를 건의하고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2. 1. 기원

위구르족 사람이 설련하에 살았기 때문에 설(偰)로 성씨를 삼았다. 원나라 태부 '''설극직'''(偰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은 원나라에서 참지정사를 지냈고,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 ? ~ 1360)은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냈다.[5]

2. 2. 고려 귀화

원나라 태부 '''설극직'''(偰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이 원나라에서 참지정사를 지냈고,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 ? ~ 1360)은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냈다. 홍건적이 대령을 침범하자 1358년(공민왕 7)에 병란을 피하여 고려로 왔다.[5]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태자를 단본당(端本堂)에서 시종하면서 설손과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를 크게 후대했다. 집을 하사하고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였다가 부원후(富原侯)로 다시 봉하고 부원(富原)에 농토를 하사하였다.[5]

2. 3. 조선 시대

설장수설손의 맏아들로, 서역인(西域人)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왕의 특별 명령으로 136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389년(창왕 즉위년)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우왕(禑王)의 손위(遜位)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 칭호를 받았으며,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같은 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그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태조의 특별 명령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었고, 계림(鷄林)을 본관으로 받았으며,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6]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설경수는 설손의 넷째 아들로,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썼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설미수설손의 다섯째 아들로,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직 중 둔전제(屯田制)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그는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쳤으며,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다.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3. 주요 인물

경주 설씨의 주요 인물로는 설손과 그의 아들들이 있다. 설손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다 고려로 귀화한 인물이며, 그의 아들 설장수, 설경수, 설미수 등도 고려와 조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설장수(偰長壽)'''는 설손의 맏아들로, 고려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후에도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 '''설경수(偰慶壽)'''는 설손의 넷째 아들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설순(偰循)''' 또한 관직에 진출했다.
  • '''설미수(偰眉壽)'''는 설손의 다섯째 아들로, 둔전제 실시를 건의하는 등 경제 정책에 기여했다.

3. 1. 설손 (偰遜)

위구르족 사람으로 설련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설(偰)로 성씨를 삼았다.

원나라 태부 '''설극직'''(偰克直)의 6세손 '''설문질'''(偰文質)은 원나라에서 참지정사를 지냈고, 설문질의 손자 '''설손'''(偰遜, ? ~ 1360)은 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냈다. 1358년(공민왕 7) 홍건적이 대령을 침범하자 병란을 피해 고려로 왔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태자를 단본당(端本堂)에서 시종하면서 설손과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를 크게 후대했다. 집을 하사하고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였다가 부원후(富原侯)로 다시 봉하고 부원(富原)에 농토를 하사하였다.[5]

설손의 맏아들 설장수는 서역인(西域人) 출신이기 때문에 왕의 특명으로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 공양왕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한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 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뒤 태조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을 본관으로 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6]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설손의 4남 설경수(偰慶壽)는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썼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은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설손의 5남 설미수는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직 중 둔전제(屯田制)의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하였고,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쳐,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3. 2. 설장수 (偰長壽)

설손의 맏아들이다. 서역인(西域人) 출신이기 때문에 왕의 특명으로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역임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되었다.[6]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하여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해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뒤 태조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을 본관으로 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6]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3. 3. 설경수 (偰慶壽)

설손의 넷째 아들 설경수(偰慶壽)는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썼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은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3. 4. 설순 (偰循)

설손의 넷째 아들 설경수(偰慶壽)는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글씨를 썼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은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3. 5. 설미수 (偰眉壽)

설손의 다섯째 아들 설미수(偰眉壽)는 1407년 참지의정부사로 재직하면서 둔전제(屯田制) 실시를 건의하여 실행하게 했다.[5] 호조와 공조의 판서를 거쳤으며, 1410년 예조판서, 이듬해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를 지냈다.[5] 1414년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검교우참찬(檢校右參贊)에 이르렀다.[5] 시호는 공후(恭厚)이다.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경주 설씨 慶州偰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1
[3] 서적 朝鮮半島における言語接触 : 中国圧への対処としての対抗中国化 東京外国語大学語学研究所 2013
[4] 뉴스 설 偰 https://www.doopedia[...] 2022-08-19
[5] 문서 『고려사』 권112, 열전25 https://terms.naver.[...]
[6] 문서 설장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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